매일 묵상
매일 한 구절, 말씀을 따라가는 여정
출애굽의 길
사순절 28 출애굽기 15장 22절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애굽기 15장 22절
홍해 그 다음은
20260321
말씀 질문
1. 홍해 사건 후에 만난 수르 광야를 누가 인도했습니까? 광야의 현실과 의미는 무엇일까요?
2. 수르 광야 같은 나의 현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어떻게 그 하루를 받아내고 짊어지고 있는지 고백과 결단의 기도를 드립시다.
홍해의 위대한 승리와 극적인 구원을 경험한 후 이스라엘은 고조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내 현실의 벽에 부딪힙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22).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왜 현실은 이렇습니까? 수르 광야에서 현실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방황하기 쉽습니다.
2023년 2월 에즈베리 대학교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2주가 이어진 예배와 찬양, 기도의 향연이었습니다. 당시 영상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공식 예배가 끝난 후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도하며 찬양하는 이들의 모습을 많은 이들이 부흥이라고 칭송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에즈베리를 넘어 지역 사회와 타 대학교로 번져가기도 하면서, 이를 21세기 대부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2026년 2월, 미국 사회는 부흥과 변화는커녕 극단적 보수 기독교와 철저히 계산된 전쟁과 폭력, 살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부흥은 어디로 간 걸까요? 이는 부흥에 대한 얄팍한 이해와 왜곡된 신학의 영향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흥은 집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대규모 집회를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함에도 오늘날 교회들이 대교모 집회나 행사, 회집 숫자 등을 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참된 부흥은 집회 이후의 일상에서 증명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일 것입니다. 홍해 사건 뒤의 수르 광야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이것입니다. 홍해 사건은 죽음과 생명을 가르는 매우 중요한 구원의 표지입니다. 홍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노래하며 온몸으로 함께 찬미했습니다. 이런 환희가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출애굽기는 홍해 다음으로 수르 광야를 보여줍니다. 수르라는 말은 벽이라는 뜻입니다. 시나이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수르 광야는 말 그대로 벽이었습니다. 이집트 제국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벽이었고, 함부로 도전할 수 없는 군사적 완충지대였습니다. 출애굽 이스라엘이 수르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끄신 걸음이니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홍해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현실의 벽에 부딪힙니다. 사흘을 걸었는데도 물이 없는 메마른 현실에 부딪힙니다. 하나님이 이끄신 걸음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수르는 자유를 꿈꾸는 이들이 반드시 겪는 현실의 벽이며 심리적 장벽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걸음은 광야를 피하는 것이 아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십자가는 바라보는 게 아니라 짊어지고 가야 하는 신앙 현실입니다. 해서 수르 광야도, 십자가도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전의 질서와 그 질서가 주는 편리와 이득을 기꺼이 내려놓고,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내어 맡길 수 있는가를 매순간마다 결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매번 유월절 같을 수 없고, 늘 홍해사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현실은 수르 광야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기적이나 감정적 고조가 아닌, 냉엄한 현실 속에서의 거룩한 결단이어야 합니다. 메마른 광야여도 주를 신뢰하는가를, 광야이기에 더욱 십자가를 선택해야 함을 스스로에게 묻고 결단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먹을 물이 떨어지고 없을 때, 그때도 홍해에서처럼 주를 신뢰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까? 수르 광야에서 주님은 질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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